경제, 주식

은둔의 ‘벼락 갑부’차용규 잠적 미스터리

레밍이 2016. 6. 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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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블로그에 있던 기사인데...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권력을 휘두르는 삼성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집단이 있다는것을 암시는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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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은둔의 ‘벼락 갑부’차용규 잠적 미스터리 [조인스]
“지난해 말 귀국 후 행방 묘연… 마피아 납치설까지”
해외파 대한민국 ‘7대 부자’ 어디로 갔나?
월간중앙

카작무스 영문 홈페이지 (www.kazakhmys.com)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경영진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CEO가 삭제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 ‘Yong Keu Cha’라는 이름이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던 자리다. 한국명 차용규. 벼락 거부로 통했던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 몰래 귀국 후 잠적설 파다… 정보기관도 사실 확인 나서
■ 세계 부자순위 754위… 정몽준 의원과 맞먹는 수준
■ 삼성 알마티 지사장 때 구리 제련사업체 카작무스 정상화 참여
■ 헤지펀드 공격에 삼성물산 손 떼… 블라디미르 김과 공동 인수
■ 런던 증시 상장으로 대박… 지분 팔고 잠적, CEO 명단에서도 빠져

요난 5월 초, 서울의 일부 기업과 정보기관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차용규가 국내에 들어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와 과거 비즈니스 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는 모 대기업이 정보 채널을 가동했다. 정보 수집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 난 이 기업은 정보망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했다. 하지만 여전히 ‘잠적설’과 ‘실종설’ 두 가지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차 전 사장의 행방을 포착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이 기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만약 차씨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우리와 동일 업종에 진출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우려 때문에 고위층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 배경을 설명했다.

차씨의 귀국설이 나돌자 정보기관도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행여 그가 한국에서 신변에 문제라도 생길 경우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그의 소재에 관한 확실한 대답은 들리지 않고 있다.

상속 기업인 아닌 보기 드문 자수성가형

차 전 사장과 면식이 있는 인물들은 그가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 잠적했으리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차씨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피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도대체 차용규는 어떤 인물이기에 “한국에 왔다”는 소문만으로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물론 정보기관까지 긴장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재벌들도 무색하게 하는 세계적 갑부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포브스>지는 올해 전 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하면서, 차용규를 전체 754위에 올려놓았다. 재산규모 13억 달러로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과 순위가 같다. 이 두 사람 외에 한국인으로서 세계적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사람은 이건희 삼성 회장(314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432위), 이명희 신세계 회장 및 신동빈 롯데 부회장(557위), 이재용 삼성 전무 및 신동주 롯데 부사장(583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및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840위) 등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재벌 2~3세로 불리는 상속형 기업인들 일색인 부자 리스트에서 보기 드문 자수성가형 부자다.

그것도 월급쟁이로 시작해 불모의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억만 금을 캐낸 전형적인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얼마 전 <선데이타임스>지가 선정한 ‘영국 1,000대 부자’에서도 68위(재산 약 1조5,000억 원)에 올랐다. 이 명단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순위는 192위였다.

그는 1956년 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다닌 그는 3수를 해서 서강대에 진학했다. 당시 경기고의 막강한 경쟁력을 감안한다면, 그는 공부와 그리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 입학 직후 군대에 가야 했다. 삼수를 한 탓에 이미 입대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었다.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입사할 때만 해도 그는 보통 월급쟁이였다. 다만 차 전 사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남보다 늦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입사 초기부터 남달리 일에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엄청난 부의 기회를 잡은 것은 삼성물산의 카자흐스탄 알마티 지점에 근무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1995년 독일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차 전 사장은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현재 수도는 아스타나)로 배치 명령을 받았다. 삼성물산이 당시 카자흐스탄 최대 구리 채광·제련업체인 카작무스의 위탁경영을 맡게 돼 그를 부른 것. 카작무스는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할 때만 해도 적자투성이의 전형적인 옛 소련 국영기업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속에서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경영이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경기고 나와 3수 만에 대학 진학

이로 인해 카작무스는 카자흐스탄에서도 손꼽히는 원자재 관련 업체였음에도 비효율적 경영 방식을 탈피하지 못해 파산 직전에 몰린 상태였다. 결국 카자흐스탄 정부는 카작무스의 위탁경영을 공개입찰에 부쳤고, 가능성을 눈여겨본 삼성물산이 낙찰받아 경영을 맡게 됐다.

▶ 1 카작무스는 런던 증시 상장을 통해 ‘대박’을 터뜨렸다.
2 카작무스의 구리광산이 소재한 알마티산맥.
3 중장비들이 구리광산에서 채굴작업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카작무스를 맡자마자 2억5,000만 달러의 대규모 재원을 투자해 회사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생산·조달·회계 전산화 등 경영 시스템을 현대화했고, 발전소·광산 등을 인수해 원재료에서 완제품 생산까지 아우르는 세계 최초의 일관 구리 생산 체제를 갖췄다.

삼성은 비효율적 경영 방식을 바꿔 나가는 한편 3만여 명의 근로자에게 고용 승계를 보장하고 그 동안 체불된 임금을 한꺼번에 지급하는 등 당근도 제시했다. 복지 시설 등에도 적잖은 투자를 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삼성물산을 ‘점령군’쯤으로 여기며 껄끄러워하던 현지인들도 한국인 경영진의 현지 친화적 경영에 마음을 열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파산직전에 몰렸던 카작무스는 삼성물산이 맡은 지 2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위탁경영이 만료된 2000년에는 자산가치 30억 달러의 회사로 거듭났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 같은 경영 능력을 보여준 삼성물산을 돌려보낼 수 없어 위탁경영이 만료된 후 지분 매입을 권유하는 러브콜을 계속 보냈다. 삼성물산은 카자흐스탄 정부의 요청을 수락했고, 2000년 지분 45%를 취득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삼성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 낸 데는 홍성혁 CSI컨설팅 대표, 김재식 전 삼성SDI 부사장 등 쟁쟁한 인물들의 힘이 컸다. 하지만 주역은 역시 차 전 사장이었다. 차 전 사장은 알마티지점장으로서 현장에 투입된 16명의 직원을 진두지휘하며 카작무스를 세계 9위 구리 제련업체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회사 수익은 5년 만에 무려 1,850% 늘었다. 해고자 한 명 없이 이룬 성과였다. 이 공로로 차씨는 1998년 부장으로 승진한 후 상무이사보를 거쳐 2000년 공동대표에 오르는 등 고속 승진했다.

2004년 삼성물산 철수 때 카작무스 인수

과거 그와 함께 일했다는 한 국내 기업 관계자는 차 전 사장에 대해 “머리 회전이 빠르고 특히 재무 부분의 능력이 탁월하다”며 “업무 추진력이 강한 것도 그의 장점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삼성물산은 2004년 사업에서 손을 떼고 철수했다. 45%의 보유 지분은 카작무스 사업에서 파트너로 활약했던 카자흐스탄 관계자들에게 매각했다. 당시 삼성의 철수 과정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황금알을 낳게 될 거위를 삼성물산이 왜 그토록 일찍 잡아먹었는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차 전 사장이 카작무스를 인수하게 되는 결정적 상황이 이 과정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물산은 쇠락한 사회주의 국영기업 카작무스를 짧은 기간에 경쟁력 있는 자본주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제 남은 것은 카작무스를 해외 시장에 상장해 그 투자수익을 회수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도 수십억 달러의 투자수익 회수를 눈앞에 둔 삼성물산이 주식 전량 매각이라는 엉뚱한 수를 두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 측은 이에 대해 “현재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투자금을 충분히 회수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며 정상적인 거래임을 강조한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종합적으로 검토해본 결과 여러 위험 요인이 있다고 판단돼 철수 결정을 내렸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재계 인사들은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해외 자본의 음모에 삼성이 곤경에 처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2003년 11월,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후 2004년 3월까지 삼성물산 지분율을 5%까지 늘리고 이를 금융감독원에 신고했다. 이로써 헤르메스는 2004년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로 등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3년 하반기와 2004년 상반기, 다른 영국계 자본들도 약속이나 한 듯 삼성물산 지분 인수에 가담했다. 영국 펀드인 스코틀랜드펀드가 삼성물산 지분 4.8%를 매입했으며 범영국계라고 할 수 있는 호주계 플래티넘자산운용도 5.8%에 해당하는 삼성물산 주식을 취득했던 것.

삼성물산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룹 지주회사 가운데 하나인 삼성물산에 대한 경영권 위협은 곧바로 삼성그룹 전체의 경영권 위기로 다가왔다. 결국 삼성물산은 그룹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카작무스를 서둘러 매각했다. 2004년 8월 삼성물산은 카작무스 지분을 약 1,000억 원에 매각하고 카작무스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당시 매각에 따른 장부상 손실은 1,416억 원이었다.

삼성물산이 철수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차 전 사장은 기로에 놓였다. 기회의 땅인 카자흐스탄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본사로 돌아가 무한경쟁에 뛰어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낯선 이국 땅에 남기로 마음을 먹었다.

차 전 사장은 현지 고려인 3세인 블라디미르 김을 끌어들였다. 블라디미르 김은 우리에게는 차용규라는 이름만큼이나 낯선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차 전 사장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카작무스의 실질적인 오너다.

김씨는 과거 사회주의 시절 카자흐스탄 콤소몰(Komsomol·공산주의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을 만큼 현지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업고 사업을 하면서 영향력을 더욱 키웠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다른 한인들도 주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니 부회장 등 카작무스의 임직원 상당수는 고려인이다. 여기에 차 전 사장은 스위스계 금융기관까지 끌어들였다.

현지에 네트워크를 가진 사업 파트너와 다국적 자본, 차 전 사장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고려인과 한국인이 힘을 합쳐 “원소기호에 있는 지하자원은 다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에서 21세기 ‘엘도라도(황금의 땅)’ 신화를 이루기로 한 것이었다.

차 전 사장과 블라디미르 김은 카작무스의 지분을 인수해 각각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2005년 10월 카작무스를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데 성공한다. 그 해 10월12일 차 전 사장은 런던 증시의 개장 버튼을 눌렀다. 카작무스 주식의 상장을 기념해서였다.

블라디미르 김 정치권 인맥 막강

토니 블레어 총리가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런던을 택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을 만큼 투자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국제 구리 시세 급등으로 카작무스는 대박을 터뜨렸다. 주가가 치솟으면서 시가총액 100억 달러의 블루칩이 됐고, 차용규도 거부 반열에 올랐다.

카작무스는 직원 6만8,000명, 2004년 매출액 13억 달러, 순이익 4억4,130만 달러의 공룡기업이다. 카자흐스탄 제스카즈간에 대규모 구리 광산이 있고 제련소도 갖고 있다. 독일 등에 자회사가 있다. 구리뿐 아니라 아연·금·은도 생산한다. 생산한 광물은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한다.

이 같은 차 전 사장의 ‘대박’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없이 해외로 나가 혼자 힘으로 막대한 부를 일궜다는 점에서 한국 부자의 모델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또 “그의 성공은 주식 덕분에 가능했고 ‘금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샐러리맨들에게는 실존하는 전설이자 선망의 대상인 그가 지난 연말 갑작스럽게 카작무스 대표이사자리에서 물러났다. 카작무스는 이러한 사실을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전 세계 언론은 그의 퇴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소식은 그가 갖고 있던 주식 전량을 모두 팔아 현금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마이닝저널> 등 해외 언론과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차 전 사장은 최근 크레디트스위스를 통해 카작무스 보유 주식(2,100만 주·지분율 4.5%, 약 1조 원 상당)을 전량 처분했다. 그가 보유했던 주식이 한때 15%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 전 사장은 최소한 3조 원 이상의 현금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회사를 떠난 이유와 주식을 매각한 배경, 그리고 주식 처분으로 확보한 거액의 현금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 들어갔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재계 일각에서는 블라디미르 김 회장과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분을 처분할 당시 블라디미르 김 회장과 차 전 사장의 결별설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확인된 바 없어 의혹만 증폭시키고 있다.

다만 블라디미르 김 회장의 행적을 쫓아가 보면 그와 차 전 사장과의 관계가 예전만 못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관측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국내에서는 차 전 사장의 성공 스토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지면서 마치 차 전 사장이 카작무스의 오너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실상 이 회사는 블라디미르 김 회장 소유라고 보는 것이 옳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오늘의 카작무스는 김 회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정도다.

블라디미르 김에 관해 국내에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그가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후손이라는 점, 그리고 현지 정치권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정도가 그에 관해 알려진 전부다. 하지만 그와 차 전 사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풀어보기 위해서는 김 회장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2004년 말 카작무스가 주주들에게 보낸 회사 소개서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김 회장은 1982년 알마티 건축학교를 졸업했으며, 박사 학위와 MBA 학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1960년 생으로 나이는 차 전 사장보다 오히려 네 살이 어리며, 2000년 이사회 의장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카작무스의 실질적 오너인 블라디미르 김 회장.
그런데 이 회사 소개서에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블라디미르 김 회장이 1995년 ‘JSC Zhezkazgantsvetmet’라는 회사의 CEO로 임명돼 카작무스에 합류한 것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1995년은 삼성물산이 카작무스를 인수하던 시점. 이 내용대로라면 김 회장은 삼성과 초창기부터 손을 잡은 인물인 셈이다.

실제로 카자흐스탄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국내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1992년 설립돼 1995년까지 존속한 카자흐스탄과 삼성의 조인트 벤처 대표를 맡기도 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가 일약 이런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그의 정치적 배경과 관계가 깊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옛 소련이 붕괴하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자마자 ‘카자흐스탄 문화·사회·과학기술개발재단’의 수장 자리에 오른다. 이 재단은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친인척 등 사회 지도층이 몸담았던 재단으로, 김 회장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2002년 당시 여당이던 오탄(Otan)당의 멤버가 되기도 했다.

실종설은 특유의 은둔 성향 때문

그는 2004년 카작무스의 이사회 멤버가 되면서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한다. 당시 이사회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김 회장과 차 전 사장 외에 블리디미르 니·우택용·러슬란 윤 등 한국인이거나 한국계로 짐작되는 인물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외에 당시 현직 카자흐스탄 모 지역 주지사의 동생 등 유력인사들의 이름도 함께 이사회 명단에 올랐다. 하지만 이 사람들 중 지금도 카작무스에 남아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카작무스를 떠나게 됐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카작무스는 회사가 상장돼 있는 영국과 본거지인 카자흐스탄 언론조차 ‘은둔의 기업’이라고 부를 만큼 비밀이 많은 회사다. 영국의 한 신문은 카작무스를 가리켜 “이따금 내놓는 실적 발표 외에는 신문에 절대 나오지 않는 기업”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언론 기피증이 유별나기는 차 전 사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세계적 부호로 떠오른 뒤 수많은 국내 언론이 인터뷰를 위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공한 언론은 없다. 특히 그는 부를 축적한 뒤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리는 상황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주(駐)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에는 차씨의 성공담이 알려지면서 기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의 문의가 지금도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연락처나 이메일 주소 등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그의 흔적만 찾을 수 있었을 뿐 실체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카작무스의 한국 증시 상장을 추진하기 위해 런던 본사를 방문했던 재정경제부 관계자조차 “영국까지 갔지만 차 사장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며 “차 사장은 이름이 알려지면서 자신의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적잖이 꺼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 1 카작무스의 구리 정제공장 전경.
2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 인근에 위치한 카작무스 공장 입구.
“A기업과 새 프로젝트를 구상 중” 소문도

이런 상황에서 최근 번지고 있는 차 전 사장의 실종설은 다분히 그의 은둔 성향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차용규 실종설’은 밑도 끝도 없이 그가 “한국에 왔다 사라졌다”는 내용이 전부다.

이에 관해서는 거액을 가진 그가 수개월째 얼굴을 드러내지 않자 영국 증시와 서울의 호사가들이 실종설을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실종설은 얼마 전부터 한발 더 나아가 ‘러시아 마피아 납치설’로 확대돼 있다. 차 전 사장이 과거 마피아와 악연을 맺은 적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차 전 사장의 얼굴에는 흉터가 하나 있다. 삼성물산 시절 러시아 마피아들에 의해 생긴 상처다. 1995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삼성물산 지점에 AK소총을 든 러시아 마피아들이 들이닥쳤다. 사무실에는 차용규 당시 지점장 등 삼성물산 주재원 16명이 일하고 있었다.

마피아들은 “카작무스가 우리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다. 만성 적자와 체불임금이 쌓여 파산 직전이던 카작무스가 끌어다 쓴 자금에 마피아 돈이 섞여 있었던 것.

차 전 사장은 “카자흐스탄 정부와 상의하겠다”며 버텼다. 마피아가 그에게 총을 휘둘렀다. 안경이 깨지고 얼굴이 찢겼다. 그 뒤로도 협박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차 전 사장은 당시 어두워지면 숙소를 나서지 못했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뒤 바닥에서 잤다. 그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협조를 받아 마피아와 협상을 벌인 끝에 200만 달러를 갚는 것으로 이 일을 해결했다.

그가 영구 귀국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공식적으로 그는 현재 영국에 체류 중이다. 하지만 차 전 사장이 지난 연말을 전후해 최소한 한 차례 이상 한국에 왔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차 전 사장을 만났다는 기업인들이 있다”는 말을 하는 재계 관계자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차 전 사장은 “지난 연말 극비리에 서울을 다녀갔으며,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이 말이 재계에 퍼지면서 “차씨가 강남에서 인수합병(M&A) 회사를 설립하려고 한다”는 말로 확대됐고, 급기야 A기업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A기업 측은 이 같은 추측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차용규 씨와 우리 회사의 인연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됐다. 물론 카작무스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물론 회사 차원에서 카자흐스탄에서의 비즈니스는 진행 중이다. 하지만 각각 다른 파트너와 상품 수출입, 석유 탐사 등의 사업을 진행 또는 검토 단계에 있을 뿐 카작무스나 차용규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덧붙였다.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 wh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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