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주식

육동인 기자의 유태인 이야기8 세계의 먹거리를 한 손안에

레밍이 2016. 6. 1. 23:22
반응형

육동인 기자님이 쓰신글입니다. 글이 좋아 스크랩합니다.

------------------------------------------------------------------------------------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태인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제 1차 시오니스트 회의. 회의가 비밀리에 열린 만큼 많은 사람들이 회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러나 회의 내용은 상당기간 알려지지 않았다.

회의가 열린 지 12년 후인 1907년. 러시아의 세르게이 닐즈라는 사람이 번역했다는 `시온 의정서(Zion Protocol)`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이 바로 `바젤 회의`의 비밀 회의록이라고 믿었다. 의정서에는 유태인들이 장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들이 상세히 들어 있었다. 핵심은 세계의 정보망과 연료와 식량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 유태인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 박해의 명백한 구실로 삼아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을 보다 못한 학자들이 나중에 이 책의 내용을 검증해 본 결과 이 책은 `바젤 회의록`이 아닌 유태인을 음해하기 위해 꾸며낸 책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6백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의 손에 학살된 뒤였다.

`시온 의정서`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놀라운 것은 `바젤회의`가 열린 후 1백년도 되지 않아 그 책에 적혀 있었던‘전략’이 그대로 현실화 됐다는 점이다. 세계 석유업계의 메이저급 회사들이 대부분 유태인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정보=돈’인 금융시장 역시 유태인들 없이는 한시도 움직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시온 의정서`에서 얘기한 3가지 중 하나인 곡물 시장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유태인들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곡물시장은 미국의 카길(Cargill)과 컨티넨탈(Continental), 프랑스의 루이스 드레프스 (Louis Dreyfus), 아르헨티나의 번지&본(Bunge and Born), 스위스의 안드레 (Andre)등 5개 회사가 세계 곡물 교역량의 50%이상을 차지하며 이른바‘5대 메이저’라는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 최대 곡물수출국인 미국의 경우 전체 무역 및 거래량의 85%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 곳의 농산물 생산지나 시카고 선물거래소 등에서 다량의 곡물을 매입, 정부와 기업에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소유 곡물의 수송, 가공, 하역, 선적, 배분, 저장시설 등 유통과정까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곡물 메이저들의 특징은 창업주 가문들이 대를 이어 경영하는 철저한 혈족중심의 경영이라는 점이다. 유태인들이 창업하지 않은 기업의 경우 대부분 경영은 유태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유태인 없이는 곡물 회사들이 제대로 경영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메이저들이 세계 곡물시장에서 갖고 있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외부세계와는 거의 단절한 채 같은 유태인들끼리 서로 협조하고 경쟁을 하면서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자신들의 이윤 앞에서는 한 사회나 국가의 존립도 상관할 바 아니라는‘이윤 절대 지상주의’가 특히 심하게 배어있는 게 곡물 메이저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국제 곡물시장에서는 메이저들이 한 국가를 상대로 싸운 몇 가지 유명한 얘기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컨티넨탈과 자이레의 밀가루 전쟁. 세계 2위의 곡물메이저인 컨티넨탈은 1973년 자이레에 현대식 밀가루 공장을 세웠다. 자이레 남부지역은 코퍼벨트(구리지대)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로 구리가 많이 나는 나라다. 그러나 이 공장에서 사고가 나, 구리값이 떨어지자 자이레 정부는 컨티넨탈이 투자한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

컨티넨탈은 뭔가를 보여주기로 하고 76년 자이레에 대한 소맥 공급량을 줄이기로 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빵집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곡물가게들은 매점매석에 열을 올리는 등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졌다. 결국 자이레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밀린 미수금을 매달 갚고 소맥대금은 중앙은행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향후 자이레가 수입하는 밀가루는 컨티넨탈이 독점한다는 요구사항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했다.

현재의 컨티넨탈은 원래 사이몬 프리보그(Simon Fribourg)라는 유태인이 1813년 벨기에 알론에 차린 곡물 무역회사가 그 모체다. 1800년대 후반 증손자인 마이클 프리보그가 룩셈부르크 루마이나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14년을 전후해 런던, 파리,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무소를 내는 등 대륙을 넘나드는 세계적인 거래망을 갖췄다. 그런 자신감으로 회사 이름도‘컨티넨탈 컴패니’로 바꾸고 1921년에는 시카고와 뉴욕에 사무소를 내며 미국까지 진출했다.

전 세계에서 돈을 긁어모은 프리보그 가문은 유럽의 최대 부자가문이었던‘메디치의 왕가’처럼 초호화판으로 살았다. 하지만 유태인을 증오하는 나치가 1940년 프랑스를 침공하자 곧바로 미국으로 도망쳤고 미국에서 사업을 이어갔다. 프리보그 가문은 아직도 회사 지분의 90% 이상을 장악하며 대를 이어 경영하고 있다.

세계 4위 곡물 메이저로 아르헨티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번지&본 사가 좌파성향이었던 메넴정권과의 수십 년간 치른 싸움도 곡물메이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46년 페론이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르텔을 형성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던 곡물회사를 배제하고 농민들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수출을 하려고 했다. 1948년 이를 전담하는 무역촉진기구(IAPI)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페론에 의해 힘이 약화된 곡물 카르텔 회사들은 페론과의 투쟁에 들어갔다. 그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결국 55년 페론은 물러났고 IAPI는 사라졌다. 페론이 73년 다시 권좌에 올라 비슷한 목적의 국립 곡물 위원회를 만들자 곡물카르텔들은 또다시 격렬하게 반대했다. 74년 페론이 죽고 남편의 정책을 이은 부인 에비타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에비타도 76년 물러났고 제일 먼저 국립곡물위원회가 폐쇄되었다. 그 뒤 아르헨티나의 곡물과 육류 수출이 다시 민간 기업들의 통제권으로 돌아갔다. 메론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메넴정권의 특징은 친(親) 곡물카르텔. 이 정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제장관은 모두 번지&번의 경영자출신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미의 거대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번지&본은 1750년 암스테르담에서 유태계 번지가문이 창업한 게 모체다. 19세기 중반 벨기에 앙트와프로 이전하면서 큰아들 챨스는 벨기에에 남고 동생 어니스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함께 이주한 매제 조지 본과 함께 ‘번지&본’을 세웠고 1927년에는 독일계 유태인인 거대 곡물거래상 알프레드 허쉬(Alfred Hirsch)에게 경영을 맡겼다. 허쉬는 이후 30년간 회사를 경영하면서 세계적인 곡물 메이저로 키웠다.

곡물메이저들이 어떻게 유태인 인맥을 구축했는지는 세계 최대 메이저인 카길을 보면 분명해진다. 카길은 미국에서만 1만2천개의 창고와 1백대의 열차를 갖고 미국은 물론 전세계 곡물 시장의 25%를 장악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곡물회사. 60여 개국에 사무소를 운용하고 있으며 곡물저장능력은 우리나라 쌀 생산량보다 많은 7백만 톤에 이른다. 1기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1억 달러가 넘는 곡물 운송용 엘리베이터를 40기 이상 갖고 있다.

카길은 원래 유태계 회사가 아니었다. 창업주인 윌리엄 카길은 미국 남북전쟁직후 이민 온 스코틀랜드출신의 전형적인 영국계 이민자다. 미국 사회의 주류인맥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1870년대 동생 샘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그는 영국 왕실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제임스 힐이란 인물과 동업을 하면서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20세기 들어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른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창업주의 아들인 윌리엄 카길 2세가 1910년경 몬태나에 투자를 잘못했을 때였다. 당시엔 사돈 집안인 같은 영국계인 맥밀란 가문(MacMillan Family) 이 지원해 주었다. 이때부터 맥밀란 가문은 카길가문과 공동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두 번째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1929년 주가폭락을 시발점으로 대공황에 빠졌을 때다. 이때는 거의 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두 명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한명은 유태인인 존 록펠러. ‘석유왕’으로 불리며 엄청난 자산을 갖고 있던 록펠러는 자신이 소유하는 체이스 내셔날 은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다른 한명은 러시아계 유태인 곡물 상인인 줄리우스 헨델(Julius Hendel)이었다. 그가 1920년대 후반 회사 경영에 참여하자 회사 안팎에선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미국 사회의 주류 세력인 영국계 미국인 회사의 핵심 요직에 처음으로 유태인이 들어간 탓이다. 하지만 당시 전세계 곡물업계는 유태인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핵심에 있지 않으면 회사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카길 가문은 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헨델을 중시한 이유이다.

헨델은 곡물의 정상적인 거래가 아닌 투기와 헤지를 동원해서 회사를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워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중반 흉작으로 미국의 옥수수 생산량이 크게 부족할 때였다. 그는 오히려 옥수수를 팔지 않고 사들이는 데만 집중했다. 보다 못한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옥수수를 팔라고 명령했지만 거절했다. CBOT는 카길을 거래소 회원사에서 추방했고 농무부는 카길을 미국 옥수수시장을 파괴한 혐의로 사법당국에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헨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헨델은 후에 마약 돈세탁에 관련된 금융기관들과의 은밀한 거래로 적지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인정머리 없고, 편법적인’거래는 계속 이어졌다.

헨델의 이 같은 독특한 경영기법은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곡물업계에선 `정통 경영 이론`이었다. 2차대전 직후인 1946년부터 52년까지 헨델 밑에서 일을 배웠던 드웨인 안드레아(Dwayne Andreas)는 나중에 역시 곡물 식품회사인 아커 다니엘 미들랜드의 회장이 되어 회사를 카길에 버금가는 거대 곡물회사로 키우기도 했다.

유럽에 있는 곡물메이저로는 프랑스의 루이스 드레프스(Louis Dreyfus), 스위스의 안드레아(Andre)가 있는데 모두 직,간접으로 유태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시온 의정서’에 나온 대로 유태인들은 이제 정보, 석유와 함께 식량도 장악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점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아랍인들이 석유는 많이 있으나 식량은 하나도 쥐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우디, 이집트, 이라크 등 2억 인구를 갖고 있는 아랍권의 식량 자급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는 많은 중동 전문가들이 이스라엘과 아랍의 향후 역학관계를 식량 패권주의에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