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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
전쟁중 불과 100여일 사이에 적군 5만명 이상을 섬멸하고 수십만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반대로 불과 100여일 사이에 아군 5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이 치명적인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런 손실이 총 한방 쏘지 않고, 그것도 아군 내부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의해 발생했다면? 국민방위군 사건은 불과 100여일 사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징집한 일종의 예비군인 국민방위군 50여만명 중 5만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전쟁이 나면 사람 목숨이 개값이라지만, 국민방위군은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정말 개만도 못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인민군에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1950년 11월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계선까지 진격하여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다급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한국군으로서는 개전 당시에 이어서 두 번째 후퇴였다. 인민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한강다리까지 폭파해가며 서울 시민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이승만 정권이 다시 후퇴 길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숱한 남쪽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또 나이가 든 사람들은 전쟁물자 수송 등에 동원되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서울은 다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군에 가용한 인적 자원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일념이 실천에 옮겨졌을 때 그 ‘어떤 일’은 상상을 초월한 비극으로 번져갔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2월21일에 첫 부대로 1만여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죽음의 행렬에 나섰다.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국민방위군도 군대인데, 이들을 남하시키기 위한 준비는 너무나 소홀했다.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정부는 예산계획을 구두로라도 설명하지 않았고, 국회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이었던 이병국(李炳國)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한톨 군복 한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대신 국민방위군에게는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되었다. 행군 도중에 대열 책임자가 이 양곡권을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모(申性模)의 국방부와 조병옥(趙炳玉)의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양곡 지급이 안 되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한 서태원(徐泰源, 5대 민의원·작고)은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로서, 다만 끌고가고 끌려가야 하는 슬픈 행렬이었다고 회고했다.
최대의 코미디 “젤리공장을 짓겠다”
엄동설한에 길을 나선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의복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장정들은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된 이상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기에 어차피 벗어버릴 민간복을 껴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갔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피복비를 전혀 계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뿐이었다. 학교 교실에서라도 숙영할 때는 교실 하나에 200∼300명씩 처넣으니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이런 속에서 살판 난 것은 이(이)였다. 어찌나 이가 많았던지 한 마리씩 잡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빗자루로 몸을 쓸어내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겨울철 열병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고,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사람들은 한번 발병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다. 국민방위군 병력을 약 50만명으로 잡으면 1개 교육대당 1만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다. 그러나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대신 이들은 이른바 ‘돌려치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천신만고 끝에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고 하고, 김해의 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 하고, 진주의 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 하고 이렇게 뺑뺑이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의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은 사무실 옆 부속실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집히는 대로 돈을 뿌리고 다녔다. 그가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이 3억원. 국가기관인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가량 될 때였다. 뒤에 윤익헌을 수사한 김태청(金泰淸, 뒤에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냄)은 윤익헌의 씀씀이에 기막혀 자신은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 쓰듯이 해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다들 우물물을 길어 먹던 시절, 갑자기 피난민들이 몰아닥쳐 물 한 동이 길어오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던 그런 시절이었다.
국민방위군의 예산 유용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50만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숱한 간부와 기간장병들의 월급은 예산의 어디에도 계상되지 않았다. 마치 조선시대의 아전들에게 녹봉이 지급되지 않아서 알아서 적당히 해먹도록 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전들은 그 지역에서 대대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해먹는 데에도 나름대로 금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육성한 테러조직인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의 지도부에게는 이런 것조차 없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는데, 이는 하루 5홉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정하게 지급되어도 하루 세끼 주먹밥과 소금국 돌아오기도 빠듯한 그 예산에서 사령부가 1/3을 떼고, 교육대의 간부와 기간 사병들이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다. 벼룩의 간을 내먹고, 문둥이 콧구멍에 박힌 마늘도 빼먹는다던 그런 시절이었다. 소금물을 묻힌 주먹밥 한 덩이도 차례지지 못해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가던 이 비극 속에서 최대의 코미디는 국민방위군 사령부가 병사들을 위해 젤리공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만 지은 것이지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라며 배고파 우는 민중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단두대에 섰던 프랑스의 어느 왕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다 떼먹힌 병사들은 훈련을 나갔다. 말이 훈련이지 교육대에 있어봤자 먹을 것이 없으니 훈련을 빙자하여 마을로 가서 재주껏 빌어먹으라는 것이었다. 굶주린 대원들은 수십명씩 떼지어 다니다가 잔칫집이나 굿판이 있으면 들이닥쳤다. 이들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냄새가 진동하여 손님들은 구역질을 참으며 코를 막고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집주인은 잔치나 굿을 망쳤다고 대성통곡했다. 이들은 잔칫상에 놓인 간장까지 싹싹 비워버렸다.
잔칫집 습격사건, 토사곽란의 비극
그러나 잔칫집 습격사건의 비극은 집주인에게 그치지 않았다. 그런 날 밤이면 갑자기 기름진 음식이 들어온 데 놀란 창자가 토사곽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원들이 숨을 거뒀다. 그래도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은 ‘먹고 죽은 귀신’이 되었으니 때깔이나마 고왔을까? 가장 많은 장정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경산교육대가 있던 경산군 압양면 일대에는 비오는 날이면 강가에서 “고향가자, 고향가자” 하는 젊은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고 한다.
군대는 군대이지만, 명부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부대. 첩보영화에서 봄직한 특수부대만이 아니었다. 죽음의 대열, 해골들의 행진이라 불린 국민방위군이 바로 그런 군대였다. 명부도 없으니 몇명이 동원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한국전란1년지>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간행의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 간행의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이 사건을 “9만명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방위군이 남하를 시작하면서 이들은 며칠 안 가 비참한 몰골의 거지떼로 변했고, 이들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그러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金潤根)은 1951년 1월8일 “우리의 앞에는 국민방위군 50만명이 있고 (…) 먹을 식량이 있고 산같이 쌓인 군기군물(軍器軍物)이 있다”고 사태의 진상을 호도했다. 이승만은 다음날 “방위군 사령관이 8일 발표한 성명과 같이 우리는 방위군과 청년단 수십만명을 앞세우고 (…) 다 일어나서 인해전을 인해전으로 막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둘러싸고 논의가 거듭되자 김윤근은 1월20일 다시 성명을 발표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이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금번 국가방위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남하시켜 철저히 확보했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찬했다. 이어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회에서 국민방위군과 관련해 “희생자가 아주 적게 난 것은 국민에게 아주 행복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제5열(스파이)의 책동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제5열의 책동에 동요 말기를 바란다”고 국민방위군 의혹사건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이어 이승만은 김윤근을 대동하고 대구를 순시하기도 하고 2월 초에는 국민방위군 장교들을 사열하고, 2월 중순에는 방위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훈시하는 등 국민방위군 지도부를 격려했다.
충성파 신성모 국방장관의 몰락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최근의 안동수 파동에서 이 한몸 다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충성파였다. 신성모는 일본 천황이란 말만 나오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이 체질화된 일본군, 만군 출신 장성들, 이승만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관료들과 이승만을 상대로 충성경쟁을 해야 했다.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던 신성모가 대한청년단장, 내무장관, 국방장관에 국무총리서리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눈물이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고,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또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지 정부의 준비부족이나 방위군 지휘부의 예산횡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기의 정치적 지지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신정동지회(新政同志會)라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예산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하여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지만, 사건의 축소와 은폐에 앞장섰다. 그는 이 사건의 수사를 여러모로 방해했으며, 결국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룰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 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서는 어처구니없게 낮은 형량이었고, 당연히 여론은 들끓었다.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李起鵬)을 장관에 임명했다. 이기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다. 다시 열린 재판에서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반적으로 군사재판은 비공개이지만 이 재심은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었는데, 방청객이 몰려 옥외에 스피커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정부에 대한 불신풍조가 극에 달하여 피고들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정부가 피고들, 특히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을 외국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이들은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공개처형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결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대통령 다음 가는 권세를 휘두르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대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했다. 1960년의 3ㆍ15 부정선거의 싹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다른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학살사건처럼 방위군 병사들을 총을 들고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해 수만명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사실상의 학살사건이다. 잠재적인 적이 아닌 아군을 그것도 수만명씩이나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당시 국가기구, 그리고 국민방위군의 호송을 책임진 우익청년단체 지도부의 인명경시풍조가 어떤 지경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태도가 이런 지경이었으니 잠재적인 적이나 통비분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민간인 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한청년단의 야망이 비극을 부르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면서 이 부대의 운영을 사설단체에 불과한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에 맡겼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 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은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진 것은 이승만 정권 수립에 행동대 역할을 해온 우익반공청년단체들이 준군사단체 또는 정식군대로 발돋움하려는 오랜 소망을 전쟁중에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했다. 1948년 국방경비대의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우익청년단체를 국군의 기간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우익청년단체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난립해 있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년 뒤에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청년방위대는 사설단체였지만, 한국전쟁 발발중에는 국가기구를 대신해 모병과 후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이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자 그대로 그 지휘부를 맡아 마침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테러집단이었던 우익청년단체 간부들에게 국가권력과 예산을 대주고, 이를 감독조차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없다.
최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최초의 학술논문을 발표한 김세중 교수는 이 사건은 “국가체제의 비효율적 작동, 그리고 일종의 가산제적 권력구조와 통치행태”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었음에도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국가경영체계를 재점검하고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이 이승만 정권의 체질이었다.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으로 분류될 때 사람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겪은 지 50년, 징병제하의 우리의 군대에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향상되었을까
전쟁중 불과 100여일 사이에 적군 5만명 이상을 섬멸하고 수십만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반대로 불과 100여일 사이에 아군 5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이 치명적인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런 손실이 총 한방 쏘지 않고, 그것도 아군 내부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의해 발생했다면? 국민방위군 사건은 불과 100여일 사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징집한 일종의 예비군인 국민방위군 50여만명 중 5만명 이상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전쟁이 나면 사람 목숨이 개값이라지만, 국민방위군은 총 한방 쏴보지 못하고 정말 개만도 못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인민군에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1950년 11월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계선까지 진격하여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다급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한국군으로서는 개전 당시에 이어서 두 번째 후퇴였다. 인민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한강다리까지 폭파해가며 서울 시민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이승만 정권이 다시 후퇴 길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숱한 남쪽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또 나이가 든 사람들은 전쟁물자 수송 등에 동원되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서울은 다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군에 가용한 인적 자원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일념이 실천에 옮겨졌을 때 그 ‘어떤 일’은 상상을 초월한 비극으로 번져갔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2월21일에 첫 부대로 1만여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죽음의 행렬에 나섰다.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국민방위군도 군대인데, 이들을 남하시키기 위한 준비는 너무나 소홀했다.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정부는 예산계획을 구두로라도 설명하지 않았고, 국회에서는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이었던 이병국(李炳國)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한톨 군복 한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대신 국민방위군에게는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되었다. 행군 도중에 대열 책임자가 이 양곡권을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모(申性模)의 국방부와 조병옥(趙炳玉)의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양곡 지급이 안 되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한 서태원(徐泰源, 5대 민의원·작고)은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로서, 다만 끌고가고 끌려가야 하는 슬픈 행렬이었다고 회고했다.
최대의 코미디 “젤리공장을 짓겠다”
엄동설한에 길을 나선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의복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장정들은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된 이상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기에 어차피 벗어버릴 민간복을 껴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갔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피복비를 전혀 계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뿐이었다. 학교 교실에서라도 숙영할 때는 교실 하나에 200∼300명씩 처넣으니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이런 속에서 살판 난 것은 이(이)였다. 어찌나 이가 많았던지 한 마리씩 잡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빗자루로 몸을 쓸어내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겨울철 열병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했고,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사람들은 한번 발병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다. 국민방위군 병력을 약 50만명으로 잡으면 1개 교육대당 1만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다. 그러나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대신 이들은 이른바 ‘돌려치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천신만고 끝에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고 하고, 김해의 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 하고, 진주의 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 하고 이렇게 뺑뺑이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의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은 사무실 옆 부속실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집히는 대로 돈을 뿌리고 다녔다. 그가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이 3억원. 국가기관인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가량 될 때였다. 뒤에 윤익헌을 수사한 김태청(金泰淸, 뒤에 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냄)은 윤익헌의 씀씀이에 기막혀 자신은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 쓰듯이 해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다들 우물물을 길어 먹던 시절, 갑자기 피난민들이 몰아닥쳐 물 한 동이 길어오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던 그런 시절이었다.
국민방위군의 예산 유용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50만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숱한 간부와 기간장병들의 월급은 예산의 어디에도 계상되지 않았다. 마치 조선시대의 아전들에게 녹봉이 지급되지 않아서 알아서 적당히 해먹도록 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아전들은 그 지역에서 대대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해먹는 데에도 나름대로 금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육성한 테러조직인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의 지도부에게는 이런 것조차 없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는데, 이는 하루 5홉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공정하게 지급되어도 하루 세끼 주먹밥과 소금국 돌아오기도 빠듯한 그 예산에서 사령부가 1/3을 떼고, 교육대의 간부와 기간 사병들이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다. 벼룩의 간을 내먹고, 문둥이 콧구멍에 박힌 마늘도 빼먹는다던 그런 시절이었다. 소금물을 묻힌 주먹밥 한 덩이도 차례지지 못해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가던 이 비극 속에서 최대의 코미디는 국민방위군 사령부가 병사들을 위해 젤리공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만 지은 것이지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지”라며 배고파 우는 민중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단두대에 섰던 프랑스의 어느 왕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이렇게 다 떼먹힌 병사들은 훈련을 나갔다. 말이 훈련이지 교육대에 있어봤자 먹을 것이 없으니 훈련을 빙자하여 마을로 가서 재주껏 빌어먹으라는 것이었다. 굶주린 대원들은 수십명씩 떼지어 다니다가 잔칫집이나 굿판이 있으면 들이닥쳤다. 이들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냄새가 진동하여 손님들은 구역질을 참으며 코를 막고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집주인은 잔치나 굿을 망쳤다고 대성통곡했다. 이들은 잔칫상에 놓인 간장까지 싹싹 비워버렸다.
잔칫집 습격사건, 토사곽란의 비극
그러나 잔칫집 습격사건의 비극은 집주인에게 그치지 않았다. 그런 날 밤이면 갑자기 기름진 음식이 들어온 데 놀란 창자가 토사곽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원들이 숨을 거뒀다. 그래도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은 ‘먹고 죽은 귀신’이 되었으니 때깔이나마 고왔을까? 가장 많은 장정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경산교육대가 있던 경산군 압양면 일대에는 비오는 날이면 강가에서 “고향가자, 고향가자” 하는 젊은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고 한다.
군대는 군대이지만, 명부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부대. 첩보영화에서 봄직한 특수부대만이 아니었다. 죽음의 대열, 해골들의 행진이라 불린 국민방위군이 바로 그런 군대였다. 명부도 없으니 몇명이 동원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한국전란1년지>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중앙일보 간행의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 간행의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이 사건을 “9만명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방위군이 남하를 시작하면서 이들은 며칠 안 가 비참한 몰골의 거지떼로 변했고, 이들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그러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金潤根)은 1951년 1월8일 “우리의 앞에는 국민방위군 50만명이 있고 (…) 먹을 식량이 있고 산같이 쌓인 군기군물(軍器軍物)이 있다”고 사태의 진상을 호도했다. 이승만은 다음날 “방위군 사령관이 8일 발표한 성명과 같이 우리는 방위군과 청년단 수십만명을 앞세우고 (…) 다 일어나서 인해전을 인해전으로 막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둘러싸고 논의가 거듭되자 김윤근은 1월20일 다시 성명을 발표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이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금번 국가방위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남하시켜 철저히 확보했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찬했다. 이어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회에서 국민방위군과 관련해 “희생자가 아주 적게 난 것은 국민에게 아주 행복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제5열(스파이)의 책동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제5열의 책동에 동요 말기를 바란다”고 국민방위군 의혹사건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이어 이승만은 김윤근을 대동하고 대구를 순시하기도 하고 2월 초에는 국민방위군 장교들을 사열하고, 2월 중순에는 방위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훈시하는 등 국민방위군 지도부를 격려했다.
충성파 신성모 국방장관의 몰락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최근의 안동수 파동에서 이 한몸 다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충성파였다. 신성모는 일본 천황이란 말만 나오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이 체질화된 일본군, 만군 출신 장성들, 이승만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관료들과 이승만을 상대로 충성경쟁을 해야 했다. 국내에 전혀 기반이 없던 신성모가 대한청년단장, 내무장관, 국방장관에 국무총리서리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눈물이었다. 신성모는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흘리고,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또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지 정부의 준비부족이나 방위군 지휘부의 예산횡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기의 정치적 지지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신정동지회(新政同志會)라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예산을 빼돌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하여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지만, 사건의 축소와 은폐에 앞장섰다. 그는 이 사건의 수사를 여러모로 방해했으며, 결국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룰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 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서는 어처구니없게 낮은 형량이었고, 당연히 여론은 들끓었다.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李起鵬)을 장관에 임명했다. 이기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다. 다시 열린 재판에서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일반적으로 군사재판은 비공개이지만 이 재심은 공개재판으로 진행되었는데, 방청객이 몰려 옥외에 스피커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정부에 대한 불신풍조가 극에 달하여 피고들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정부가 피고들, 특히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을 외국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이들은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공개처형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결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대통령 다음 가는 권세를 휘두르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대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이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했다. 1960년의 3ㆍ15 부정선거의 싹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다른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학살사건처럼 방위군 병사들을 총을 들고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해 수만명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사실상의 학살사건이다. 잠재적인 적이 아닌 아군을 그것도 수만명씩이나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당시 국가기구, 그리고 국민방위군의 호송을 책임진 우익청년단체 지도부의 인명경시풍조가 어떤 지경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태도가 이런 지경이었으니 잠재적인 적이나 통비분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민간인 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한청년단의 야망이 비극을 부르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면서 이 부대의 운영을 사설단체에 불과한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에 맡겼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 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은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진 것은 이승만 정권 수립에 행동대 역할을 해온 우익반공청년단체들이 준군사단체 또는 정식군대로 발돋움하려는 오랜 소망을 전쟁중에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했다. 1948년 국방경비대의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우익청년단체를 국군의 기간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우익청년단체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난립해 있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년 뒤에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청년방위대는 사설단체였지만, 한국전쟁 발발중에는 국가기구를 대신해 모병과 후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이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자 그대로 그 지휘부를 맡아 마침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테러집단이었던 우익청년단체 간부들에게 국가권력과 예산을 대주고, 이를 감독조차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없다.
최근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최초의 학술논문을 발표한 김세중 교수는 이 사건은 “국가체제의 비효율적 작동, 그리고 일종의 가산제적 권력구조와 통치행태”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었음에도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국가경영체계를 재점검하고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이 이승만 정권의 체질이었다.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으로 분류될 때 사람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겪은 지 50년, 징병제하의 우리의 군대에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향상되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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